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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2건
- 2013.06.05 부족한 기독교 1 - 심리학
- 2013.05.24 부족한 기독교 3 - 엔터테인먼트
글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 1
▶ 심리학은 왜 반기독교적인가
-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다.
-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
- 심리학, 심리학 중에서도 심리 치료 또는 정신 분석의 창시자들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대표적으로 프로이트와 카를 융을 들 수 있다.
- 이러한 연유로 성경을 왜곡하고 반대되는 주장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는 '기독교 심리학'이란 이름으로 교회로 들어오는데 교묘하게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보는 듯 하나 파헤쳐보면 결국 일반 심리학과 다를바가 없다.
▶ 심리학이 쓴 세개의 가면
1. 자기사랑(Self Esteem, Self Love, Self Image)
a. 자기 사랑의 전파자들 : 카를 융, 에릭 프롬, 칼 로져스
b. 자기 사랑이 가진 오류
- 자기 사랑을 하나의 치료약, 다른 말로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
- 지금은 자기 사랑이 너무 모자라서 문제라는 시각.
c. 자기 사랑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내가 피곤할 때 잠을 자고, 배가 고플때 먹고, 추울 때 옷을 껴입는 것 처럼 당연히 스스로를 보호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 성경에서 자신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바리새인이 참 많이 나온다.
d.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 나의 창조주이시다.
e.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저지른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감추는 것이었다. 즉,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모습은 자기 사랑이 아닌 부끄러움과 수치이다.
f.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는 오늘도 우리를 위협하지만, 우리에게 진정 은혜가 되는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님에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해주신다'는 것이다.
2. 긍정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
a. 긍정적 사고방식의 전파자들 : 노만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ㅈㅇ ㅇㅅㅌ.
b. 오늘날 교회에서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으면 문제아로 여겨진다. 또한 긍정적 사고방식을 외치는 설교가 넘쳐나고 있다.
c.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예수님은 참으로 부정적인 행동도 참 많이 하셨다.
- 부자청년을 돌려보낸 점, 주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베드로에게 세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 것, 바리새인들 등에게는 저들이 믿고 돌아올까봐 말해주지 않는다고 하시는 등.
- 이런 면에서 바울도 마찬가지다.
- 오히려 사탄은 감언이설로 우리를 의미없는 것에 용기를 북돋우곤 한다.
d. 긍정적 사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두가지 모순
- 실제 자기의 중요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긍정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 누군가에게 긍정적이 되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e. 긍정적 사고방식은 성경을 왜곡한다.
f. 성경의 목적은
- 바른 교리(doctrine)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 우리를 책망(reproof)하는 것이다.
- 우리를 바르게(correction) 하는 것이다.
- 우리를 의롭게 자라도록(instruction in righteousness) 훈련하는 것이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5-17
g. '긍정'의 뜻/ '부정'의 뜻
======= 네이버 국어사전 =======
긍정 (肯定)[긍ː정] [명사]
1.그러하다고 생각하여 옳다고 인정함.
2.<논리>일정한 판단에서 문제로 되어 있는 주어와 술어와의 관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일. ...
3.[북한어]좋게 평가하고 본받을 만한 사실.
유의어 : 납득, 시인7, 승인2
부정10 (否定)[부ː정] [명사]
1.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아니하다고 반대함.
2.<논리>일정한 판단에서 주사와 빈사의 양 개념이 일치하지 아니함. 곧 사물이 서로 일정...
유의어 : 부인2
======= 네이버 국어사전 =======
- ㄱㅈㅇ ㅎ에서 말하는 긍정은 오히려 부정에 가까운 듯 하다.
- 나의 상황(내가 죄임임을)을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며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말하라 하는걸 보니.
h. 성경에서 말하는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그러하라는 것이지 심리학적으로 자기에게 최면을 걸어 긍정적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 아니다.
3-1. 성공의 법칙 1 : 말한대로 된다.
a. 기독교 안에 스며든 주문 : 예수님께서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신 기도를 하고 있다.
-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이방인이 하는 기도이다.(힌두교의 주문, 남묘호렌게쿄의 주문 등)
- 특별히 대표적 기도의 예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요즘은 주문처럼 외우곤 한다.
b.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이 믿음으로 둔갑되어 사용되고 있다.
3-2. 성공의 법칙 2 : 상상하는 대로 된다.
a.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상상을 통한 시각화의 기법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 축복 그림을 그려라.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라. 그러면 목표한대로 이루어진다. 등
- 오프라 윈프리 주요 뉴에이지 사상가들을 미국인의 일상 삶 속에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파고들도록 만들고 있는 인물로서 크리스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b. 비전을 상상과 다를 바 없이 사용하곤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바른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다.
- 그런 측면에서 비전은 참 많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상상, 꿈, 성공.
c.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나 생각으로 그 뜻을 끌어낼 수 있는 마징가 제트가 아니다.
비과학적 사고가 주는 폐해에 진저리를 치던 사회가 과학이 주는 미래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 고작 200여년 전입니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를 가져다 주리라 믿었던 과학은 ......과학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비참하지 않았을 20세기의 전쟁들을 겪으면서 인간은 이제 과학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또다시 비과학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 비과학의 세계도 아주 그럴듯한 '과학적'용어들과 '종교적' 용어들로 포장되어 인간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과거 인간은 몸으로 돌을 날라서 바벨탑을 쌓았지만 이제는 말과 상상만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는 바벨탑을 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성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오해
1. 나한테 느낌이 와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말씀은 단순히 문자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 말씀은 느낌으로 읽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올해의 말씀이니 하는 명목으로 주문처럼 말씀을 외우는 것도 그렇게 큰 의미는 없다. 이런 일들은 말씀을 단편적이고 부분적으로 알게 만드는 대표적인 예이다.
2. 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머리만 커지고 가슴은 차가워져서 기도를 열심히 안 하게 된다.
- 성경을 진실로 아는 사람은 가슴이 차가울 수가 없다. 말씀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대화를 사모하지 않을 리가 없다. 이는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을 '나는 그래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라고 포장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기도의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하는 것이다.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요, 신실하신 약속이기 때문이다. 다니엘 9:1-4를 살펴보면 다니엘도 예레미야의 책(아마 예레미야서를 말할 것이다)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3. 성경의 가르침 중 상당수는 오늘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 문화가 달라서, 시대가 달라서 말씀은 지금과 맞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현재의 유행하는 사조를 좇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한 예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으로도 드러나고 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리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1:26-27
▶ 성경으로 돌아가자
현재 한국 교회에는 성경이 필요 없는 설교가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도 참 많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래도 1주일에 한번 좋은 말씀은 듣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는 있으니. 하지만 이런 좋은 말씀은 가까운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만 가도 충분히 습득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삼위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들으려 하는 것이지 교훈을 얻으러 교회 가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1. 성경으로 돌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성경의 충분성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다.
충분한지 알기 위해서는 일단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2.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깊고 넓게 그리고 간절히 읽어야 한다.
요즘 큐티라는 이름으로 하루에 몇 구절 정해진 본문을 읽은 후 적용거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매일, 지속적으로 해서 성경의 전체 내용을 알게 된다면 괜찮겠으나 며칠에 한번씩, 자기 위안을 삼는 도구로 하는 것은 자기 착각에 빠지기 좋게 만드는 것 같다. 특히나 이 '적용'이란 것이 굉장히 개인적이고 자기 위주로 말씀을 해석해버리는 경우가 파다한 것 같다.
다윗의 시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두가지의 큰 주제가 있는데 하나는 말씀을 향한 갈증이며 또 하나는 말씀 앞에 비추어 드러나는 다윗 자신의 죄에 대한 괴로움이다. 하지만 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말씀은 자신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생명 그 자체였다.
3.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2
말씀은 우리에게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갈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4.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는 복받은 시대다.
요즘은 말씀을 접하기 참 쉬운 시대다. 또한 번역본 뿐 아니라 각종 자료도 참 많은데 보지 않는다.(물론 그만큼 조심하여 선별해야 한다. 성경을 쉽게 받아들이고자, 혹은 더 잘, 더 많이 받아들이고자 한다며 들어온 것이 심리학이라 생각된다)
5.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 순종해야 한다.
'의심하지 않고 다 믿는다'라는 말은 '별 관심이 없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둘다 (건전한) 의심이나 탐구심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는 말씀은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세상의 것에 귀 기울이지 않고 우리를 속이는 것에 속지 않을 수 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 14:21-24)
췌장암과 대장암은 암 중에도 위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에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췌장암의 경우 생존율이 5% 정도라 할 정도로 후기에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대장암의 경우는 내시경을 통해 살펴보지 않는 이상 잘 알 수 없다고 한다.
보이는 적과는 싸우면 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적이 들어오는지 항상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눈에 띄는 수많은 이단들보다 이런 심리학과 같은 것이, 뉴에이지가 더 무서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올바른 예를 보는 건지 잘못된 예를 보는 건지 긴가민가 한 부분이 많을 정도로 심리학은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주의해야 하며 지금 보고 있는 글이, 지금 듣고 있는 것이 과연 나를 향하는지, 하나님을 향하는지 늘 깨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은 사람에게 수렴하는 것이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자 만들어진 학문이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 1문은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향해야 함을 말한다. 107개의 문답중 가장 처음에 그걸 말한다.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부끄럽지만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오는 당연한 모습은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넌 괜찮은 사람이야'를 말하며 말씀으로 은혜 받을 때 나오는 당연한 단계(회개)를 부정한다. 이것이야 말로 '부정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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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글
아무튼 나의 그런 생각에 도움을 줄 만한 책을 찾았다.
늘 보고 싶었지만 책 사는게 습관이 안 되어 있어 잘 보지 않다가
11번가 대란때 구매한 책.
(표지_Yes24.com)
▶ 요즘은 찬양(CCM)이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1. 찬송가 : 애초에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교육하기 좋게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곡조를 붙여 만든 찬양
2. 복음성가 :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CCM, 복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찬송가보다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가사가 많다.
3. 워십송 : 요즘 가장 많이 사용되는 찬양, 복음성가에 비해 예배때 사용하는 음악 답게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가진 경우가 많지만, 록의 음악적 요소가 결합된 경우가 많고, 의미없는 반복 혹은 검증되지 않은 가사인 경우가 많다.
4. CCM : Contemporary Christan Music, 현대적인 찬송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대적인 크리스챤의 세계관을 담은 음악이라고 하는게 맞을 듯 하다. 대표적인 CCM으로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새"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 개인적으로 우려하는 부분은 워십송에 대한 것이다.
▶ 새노래로 주를 찬양하라.
- 지금과 같은 워십송을 옹호하는 경우 몇가지 논리가 있는데
1. 첫째는 사람들이 함께 찬양하고, 새신자를 모으는데 유용하다는 것인데
지금의 워십송은 록의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그런 요소는 사람을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감정적인 흥분을 일으키는데 일조한다. (이는 이단, 사이비에서도 많이 이용하는 방식으로 흥겹고 빠른 노래를 통해 사람들을 무아지경에 이르게 하고 이를 '성령 받았다, 신이 내렸다' 등의 표현을 하며 사람을 현혹시키곤 한다.)
또한 찬송은 앞에서 얘기한 것 처럼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과연 그런 목적에 충실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간혹 성경구절을 차용해 와서 좋아 보이는 경우도 있으나 따지고 살펴보면 단순한 반복, 일부 구절의 차용으로 성경 본래의 뜻을 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 둘째는 새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하셨는데 계속해서 새로운 노래로 찬양하는 것이 어떻냐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노래란, New music이 아니라 Music by New man.이라는 표현이다. 즉,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말이다.
▶ 과도한 CCM의 사용은
- 예배를 공연으로 만들고, 공연은 필연적으로 스타를, 즉 사람을 돋보이게 만든다.
-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청소년의 감성을 자극해 신앙 색깔을 결정한다.
- 세상에 친밀하게 다가가고자 세상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간다.
- 음악으로 인한 흥분으로 가짜 회심자를 만들게 된다.
-> 나 역시 CCM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 이후에 꼭 수반되어야 할 것은(내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도 그 시간의 공백이 꽤 걸렸던 것 같다)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중요한 사실이 오갈 때에는 보통 음악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 신중하고 정확하게 그 뜻이 전달된다. 예를 들어 (극단적일지 모르지만)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거나, 평소 생활에서 직장 회의 시간 등에 음악을 틀어놓거나, 뮤지컬 처럼 음악으로 말을 전달하는 경우는 없다.
▶ 성경적 예배의 회복
1. 위로부터 받아 누리는 예배
과도한 워십송은 예배의 주체를 사람으로 만든다. 하지만 진정한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그 은혜에 감사로 반응하여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 찬양이 되어야 한다.
2. 은혜의 방편 - 말씀과 기도와 성례
찬양을 하고 나서 종종 "오늘 정말 은혜로워" 라고 하곤 한다. 나역시 예전에 그랬던 것 같으니깐.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늘 조심스러웠던건 '이게 나의 감정상태의 흥분 때문에 느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은 세가지이다. 말씀, 기도, 성례(성찬과 세례). 이 세가지를 통해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위에서도 말했듯 찬양은 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찬양이 은혜의 방편이 되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3. 예배는 성도를 하나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지금의 예배는 종류가 너무나 많다. 그리고 보통 그 종류는 찬양의 종류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찬양예배, 열린예배로 불리는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이나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오히려 닫힌 예배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성경적 찬양의 바른 모습
1. 찬양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그 반응을 은혜의 방편과 동등한 위치로 격상시켜서는 안된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88문 - 107문까지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럼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가 아니냐 라는 반문에는 역시 98문 - 107문의 기도에 대한 문답을 확인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기도의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고백이나 음악이 아니라 주기도문임을 말한다.
2. 찬양은 바른 신학 내용을 담아야 한다.
특별히 시편은 찬양의 모범이 된다. 물론 시편에도 시편기자들의 개인적인 고백이 있겠지만 그 고백에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고백이 수반되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요즘은 시편 가사의 일부만을 차용하여 그 뜻을 바르게 전달하지 않는 워십송도 많으니 주의하여야 한다. 찬양은 하나님을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3. 필자는 바람직한 찬양의 예로 존 뉴턴의 <Amazing Grace>를 들고 있다.
- 그의 찬양은 깊고 개인적이며 무엇보다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체험에서 우러나왔다.
- 그의 찬양의 구조는 강하면서 또 단순한 구조다.
- 그의 찬양은 일상의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한다.
- 그의 찬양은 무엇보다 깊은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 CCM과 워십송의 바른 위치
1. 워십송
록을 기반으로 한 워십송은 예배에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전도의 수단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흥분제, 또는 회중의 분위기를 좋게 하기 위한 요소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교회적 차원에서 워십송에 대한 선별 작업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2. CCM
앞에서 말했듯 우리는 대부분의 워십송을 CCM이라 여기며 듣고 있다. 하지만 CCM은 그보다는 넓게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만들어진 노래라 보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CCM을 만들고 듣기 위해서는 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교회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그에 걸맞게 CCM은 교회 안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의 음악과 경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세상 누가 봐도 뛰어난 예술성과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으로 CCM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도 내가 어느정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내용인지는 알겠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 이 생각을 전달할 때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생각과 다르게 행동할 때도 많을 것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이런 (꼭 음모론 같은) 한국교회의, 그리고 성도들의 신앙을 바르게 잡고자 하는 책을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책만 읽으면 (꼭 음모론 책을 읽으면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고) 시험드는 것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감사하게도 드는 생각은
1. 예배의 주인,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며
2. 구원은 오직 하나님 주권 아래 은혜로 주어진다. 는 것이다.
세상은 자꾸만 사람을 향한다. 사람에게 집중하고, 사람이 전부인 양 논리를 펼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할 것이기에 세상은 교회에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 반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변함없어야할 교회가 변하기 때문에 세상은 다시 교회를 미워하게 되고, 믿을만 하지 못하게 보는 것 같다.
변함 없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우리도 변함없이 바르게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 이 교회를 바르게 세워나가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을 품기 위해 세상과 다를 바 없어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늘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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