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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옥성호. 부흥과 개혁사
현재 절판. 국제제자훈련원(DMI) 개정판 출판
뭔가에 꽂힌 듯 책을 많이 사게 되는 바람에 중고서점에서 힘겹게 구했다. 성령에 대한 왜곡과 예전에 선물 받았던 '하늘의 언어'를 읽어보기 위해 꼭 보고 싶은 책이었다. 사실 방언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해서 알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셀장을 처음 해보기 전, 한번은 차기 셀장을 섬기게 될 사람들까지 함께 셀장 성경공부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 했던 본문이 고린도전서 14장이었던 것 같다. 그때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예언은 믿는 자에게 유익하다란 구절을 두고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말씀을 듣자마자 들었던 생각과 토론 후에 들었던 생각과 이후에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책을 읽고 난 후의 생각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어느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변하게 된 생각은 믿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유대인을 말한다는 글쓴이의 견해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성경에 나오는 방언에 대하여, 그리고 예언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은사들을 통하여 나에게, 또 교회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해보고 이 뿐만 아니라 다른 은사들을 교회의 덕을 세워가기 위하여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 사도행전의 방언
1. 오순절 사건
-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방언이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었다. 그들의 마음이 방언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녹았고 이후에 이어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나같이 울며 회개하고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다.
- 방언을 한 사람은 마가의 다락방의 120명이기보다는 예수님의 열두제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호칭도 그렇다. 아마 오순절 모여 있던 사람들은 사도들 뿐이었거나 혹은 더 있었더라도 사도들만 방언을 하였을 거라 보는 것이 옳은 듯 하다.
- 그 자리에서 '성령을 달라고' 구한 사람은 없다. 성령께서 정하신 때에 사도들에게 임하신 것이다.
- 성령 세례의 외적인 특징은 바람소리, 불의 혀, 그리고 방언이다. 현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이 감성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 누구나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 초대교회가 방언을 했다는 것을 그대로 적용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이 소유를 나누고 통용하는 그런 공동체의 모습은 왜 간과하는가.
- 앞선 120명의 경우처럼 믿은 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을 구하나 그것은 오순절 전에 이루어지지 않은 성령강림의 특수한 상황이었으며 지금의 일반적 상황은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구원의 자리에 나아온 3천명이다. 즉, 그들처럼 우리도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를 동시에 받게 된다.
2.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
- 빌립의 전도 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 땅으로 보냈다. 그만큼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예수님의 승천 명령에도 언급될 만큼 사마리아는 특수한 지역이었다.
- 본문에 방언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으나 많은 신학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부분을 방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그들이 전도되고 회심할때 그 자리에 사도가 있었다면 그 순간 방언을 받았을 것이다. 방언은 사도의 권위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3. 고넬료의 회심 사건
- 베드로는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길에 이끌려 어쩔수 없이 간 측면이 강하다.
- 그런데 이방인인 고넬료에게도 성령이 부어짐을 보고 놀라게 된다.
- 이는 베드로 뿐만이 아니라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도 이방인에게 복음 전해지는 것을 놀란다.
4.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 회심 사건
- 방언 사건에서 처음으로 바울이 등장한다.(고넬료 방언 사건 이후 거의 20여년이 흐른 뒤)
-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증거하였다.
- 바울이 성령의 은사를 베풀 수 있다는, 즉 사도로서의 권위를 교회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을 것이다.
5. 예언 성취를 통한 구속사 완성
(1) 오순절 사건을 지금에도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 오순절이 없으면 교회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오순절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 사건과 관련된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 베드로가 밝혔듯 이날의 방언 사건은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 요한의 세례가 물로 이루어졌으나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 사도시대도, 예수님의 성육신도 반복적이지 않듯이 성령이 오순절날 기적처럼 오신 일도 반복되는 일은 아니다.
(2) 개인이 아닌 다수 속에서 나타나는 은사이다.
- 사도행전에는 여러가지의 개인 회심 사건이 있으나 그 곳에서는 방언은 언급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 회심이 극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3) 방언은 성령 세례와 관계 없다.
- 2차 성령 세례도 당연히 없다.
- 누구나 기독교인이 될 때 다 예외 없이 성령 세례를 받는다.
방언은 어떤 특별한 패턴을 가지고 받는 것이 아니고 노력하거나 간구한다고 받는 것도 아니다. 초기 교회가 생겨나는 특별한 시기에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방언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그 말씀에서 믿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못했던 유대인이라는 시각이 또한 놀랍게 받아들여진다.
▶ 고린도전서의 방언
1. 고린도전서의 배경
(1) 고린도라는 도시
- 고린도는 머리 긴 남창들이 많던 곳이었다. 그래서 고전 11:14에서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며 충고한 것이다.
- 사랑과 다산의 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는 이 곳은 천 명의 여사제들이 일하며 밤에는 예배의 한 의식으로 몸을 팔던 곳이다.
- 13장의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어쩌면 아프로디테 신전의 광란의 의식에서 사용된 요란한 악기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델파이 신전'이 있는데 이곳의 신탁(오라클)은 명성이 대단했다. 그곳에서는 '방언 예언'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 이런 신전에서 사용된 방언과 예언은 제물로 바쳐지는 돈의 액수에 따라 달라질만큼 의미없고 정신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 이런 면에서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이러한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에베베에베베' 방언이 잘못된 혹은 적어도 교회와는 맞지 않는 것임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2) 고린도전후서의 어투
- 고린도 교회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분노, 빈정거림, 책망, 교정 그리고 교훈으로 점철되어 있다.
- 여유로운 마음으로 교훈을 주기위한 편지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매우 긴박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다. 방언 주장자들이 하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해 주신다는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은 도리어 지금 방언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이 하고 있는 것이다.
-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많은 관심이 있고 또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 듯 하나 그 중 방언을 우선시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바울은 3장에 걸쳐 은사에 대한 범주 안의 방언에 대한 말씀을 남기고 있다.
2. 12장 : 은사의 본질
- 방언을 사용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말하는 경우도 생기는 등 여러 사탄의 공격이 있었던 듯 하다.
- 은사의 주인은 하나님 한분이시다. 교회를 갈라놓는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은사라고 할 수 없다.
- 의도적으로 은사를 나열할 때 방언을 가장 마지막에 두고 있다.
-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으로 노력이나 간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등급을 나눌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 누구나 다 특정 은사를 (누리고 싶다고) 누리는 것이 아니다.
- 31절. But earnest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I show you a still more excellent way.(NASB)
-> 지금껏 12장 전체에서 은사를 무작정 받으려 하고 행하려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 하고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 말하기엔 어색해보인다. 한글 번역에 빠진 But 을 생각해본다면, earnestly의 간절하게 라는 의도적인 강조점을 생각해본다면 "그러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해(봐)라. (난 그것과 관계없이)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여전히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겠다." 라고 비꼬는 듯한 말투로 읽는 것이 옳을 듯 하다.
- 본격적으로 방언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방언을 포함한 더 큰 테두리인 은사의 본질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 이어서 방언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사랑에 비하면, 혹은 사랑이 없으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가르쳐 준다.
3. 13장 : 은사보다 귀한 것과 온전한 것의 도래
- 1절에서 굳이 방언을 짚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 방언으로 인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의미하다.
- 온전한 것이 올 때 : 성경이 완성될 때 예언, 방언, 지식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초대 교회 시절 완성된 성경이 없었던 시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성경이 완성되면서 목적이 완수되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다. 이 역할은 오롯이 성경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 13절을 영어성경은 But 혹은 And로 단순히 연결한다. '그런즉'으로 번역한 한글 성경과는 뜻이 좀 다를 수 있다. 믿음, 소망이 천국에 갔을 때 필요없어지기 때문도 아니다. 13절 자체에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다고 했다. 도움이 될 만한 한 해석을 언급하자면 여기서 사랑은 요한일서 4:16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더이상 강조할 수 없을만큼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13장 내내 사랑에 대해 강조한 본문은 은사가 이기적 속성이 아닌, 사랑을 반드시 품어야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 은사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남을 세우고 돕는 것이다.
4. 14장 : 방언의 본질과 역할
(1)방언과 예언의 비교
- 예언에 대해서 정확한 설명은 없으나 표와 같은 내용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방언 |
예언 |
이해 안 되는 말 |
이해되는 말 |
자신에게만 도움이 되는 은사 |
교회에 도움이 되는 은사 |
혼자 얼마든지 활용하는 은사 |
교회를 위해 공동체 안에서 활용되는 은사 |
(2) 2절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 비록 문제가 좀 있지만 여전히 유용한 방언의 효용성을 이야기 하는 걸까? 문맥에 맞지 않게?
- 14절에도 나의 영으로 기도한다는 부분이 있는데 비꼬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마음엔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 나의 영이란 표현은 12장의 하나님의 영이란 표현과 대비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 성경은 마음과 영혼을 특별히 다르게 보지 않는다. 결국 바울의 비아냥 거리는 표현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3) 하나님의 암호
- 전쟁시에 상대방이 우리 암호를 해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영적 전쟁에서 사탄이 알아듣지 못할 하늘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 에베베 에베베 방언은 말하는 사람조차도 알아듣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전쟁시에 우리편도 알아듣지 못하는 암호를 뿌리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4) 은사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 개인 경건의 증진이 교회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지금의) 방언이 유익하다 라고 주장하는데 신유의 은사로 나은 사람이 교회를 해집고 다니며 피해를 주기 시작하면 그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해치는 은사인가?
- 바울이 말하는 것은 각각의 은사의 역할에 근거한 직접적 영향력에 대한 것이다.
(5) 방언을 통역하라는 가르침의 중요한 의미
-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 즉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주변의 누군가(현지인 등)에 의해 알아들어졌다.
- 언어와 소리는 다르다. 특별히 음이없는 피리나 거문고 등으로 통역되지 않는 방언이 음이 없는 악기가 내는 소리와 다름 없음을 말씀한다.
(6) 품위 있고 질서 있게
- 개인 경건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 앞에서 방언을 사용하라. 다만 많아야 세사람이, 그마저도 통역이 되지 않으면 사용하지 말것을 명한다. 그리고 이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해야 한다.
- 그러므로 오히려 예언을 하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기에 모두가 분별할 수 있으므로 도움이 된다.
- 다만 이 시대는 온전한 것이 아직 오지 않은 시대이기에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고 명한다.
- 이는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주의 명령이라고 말씀한다.(37, 38절)
▶ 오늘날의 방언
1.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닌 이유
(1) 오늘날의 방언은 학습과 훈련으로 습득 가능하다.
- 은사는 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주권이기에 당연히 그것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이유도 없다.
- 은사, 특별히 방언으로 성령님의 내주 혹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2) 오늘날의 방언은 기독교 밖에 더 많이 있다.
- 특별히 이단이나 사이비의 제사장소에 가보면 쉽게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들은 그런 체험으로 자신이 믿는 것을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다.
- 같은 행동이 교회 안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고, 교회 밖의 다른 장소이기 때문에 이상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2. 오늘날의 방언 열풍이 줄 수 있는 위험들
- 에큐메니컬 운동의 동력 : 전기독교적인, 통합하고 연합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사상.
- 구원의 이원화 : 성령의 사역을 구원사역과 (2차 성령세례를 통한) 충만 사역으로 이원화 시키는 잘못을 범한다.
-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 : 성령이 무슨 비타민인줄 아나.
- 한두 구절로 만들어진 신학 : 무엇보다도 말씀의 왜곡된 해석이 보태진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말씀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더 올바른 번역을 하기 위해 여러가지 버전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런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해소하고 싶어하고 현대에 들어서 '방언'이란 것을 찾아낸 듯 하다. 2천년 가까운 시간동안 사용되지 않았기에 잘 모르는,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어서 거룩해보이는 방언을.
에베소 지역에 이름이 없는 신에게 라는 신에게 경배를 하는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모세의 부재로 바른 이끄심을 따를 수 없을 때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하나님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심이 이 시대에는 방언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는다고 무조건 옳은 일이 아님을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 사건으로 우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고, 그 성경을 잘 알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주신다. 즉, 성경을 어긋나는 성령이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아갈 땐 성경을 통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 부족함을 체험으로 채우려 해서는 안된다.
교단의 특성 때문인지 주변에서 방언이 많이 들리진 않는다. 간혹 기도회 할때 들리곤 하지만 그 분들은 구석진 곳에서 기도하시곤 한다. 그 분들의 열심을 알고 존경한다. 이런 말을 하는 나보다도 더,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 뜨거움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방언을 받게된 연유와 성경에서 방언을 어떻게 말씀하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분들의 신앙이 우리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해지고 나누어져서 그것을 듣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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