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옥성호. 부흥과 개혁사

현재 절판. 국제제자훈련원(DMI) 개정판 출판


 뭔가에 꽂힌 듯 책을 많이 사게 되는 바람에 중고서점에서 힘겹게 구했다. 성령에 대한 왜곡과 예전에 선물 받았던 '하늘의 언어'를 읽어보기 위해 꼭 보고 싶은 책이었다. 사실 방언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해서 알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셀장을 처음 해보기 전, 한번은 차기 셀장을 섬기게 될 사람들까지 함께 셀장 성경공부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 했던 본문이 고린도전서 14장이었던 것 같다. 그때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예언은 믿는 자에게 유익하다란 구절을 두고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말씀을 듣자마자 들었던 생각과 토론 후에 들었던 생각과 이후에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책을 읽고 난 후의 생각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어느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변하게 된 생각은 믿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유대인을 말한다는 글쓴이의 견해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성경에 나오는 방언에 대하여, 그리고 예언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은사들을 통하여 나에게, 또 교회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해보고 이 뿐만 아니라 다른 은사들을 교회의 덕을 세워가기 위하여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저자
옥성호 지음
출판사
부흥과개혁사 | 2008-02-2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옥성호 집사의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전통적인 개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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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의 방언

1. 오순절 사건

-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방언이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었다. 그들의 마음이 방언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녹았고 이후에 이어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나같이 울며 회개하고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다.

- 방언을 한 사람은 마가의 다락방의 120명이기보다는 예수님의 열두제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호칭도 그렇다. 아마 오순절 모여 있던 사람들은 사도들 뿐이었거나 혹은 더 있었더라도 사도들만 방언을 하였을 거라 보는 것이 옳은 듯 하다.

- 그 자리에서 '성령을 달라고' 구한 사람은 없다. 성령께서 정하신 때에 사도들에게 임하신 것이다.

- 성령 세례의 외적인 특징은 바람소리, 불의 혀, 그리고 방언이다. 현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이 감성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 누구나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 초대교회가 방언을 했다는 것을 그대로 적용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이 소유를 나누고 통용하는 그런 공동체의 모습은 왜 간과하는가.

- 앞선 120명의 경우처럼 믿은 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을 구하나 그것은 오순절 전에 이루어지지 않은 성령강림의 특수한 상황이었으며 지금의 일반적 상황은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구원의 자리에 나아온 3천명이다. 즉, 그들처럼 우리도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를 동시에 받게 된다.


2.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

- 빌립의 전도 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 땅으로 보냈다. 그만큼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예수님의 승천 명령에도 언급될 만큼 사마리아는 특수한 지역이었다.

- 본문에 방언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으나 많은 신학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부분을 방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그들이 전도되고 회심할때 그 자리에 사도가 있었다면 그 순간 방언을 받았을 것이다. 방언은 사도의 권위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3. 고넬료의 회심 사건

- 베드로는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손길에 이끌려 어쩔수 없이 간 측면이 강하다.

- 그런데 이방인인 고넬료에게도 성령이 부어짐을 보고 놀라게 된다.

- 이는 베드로 뿐만이 아니라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도 이방인에게 복음 전해지는 것을 놀란다.


4.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 회심 사건

- 방언 사건에서 처음으로 바울이 등장한다.(고넬료 방언 사건 이후 거의 20여년이 흐른 뒤)

-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증거하였다.

- 바울이 성령의 은사를 베풀 수 있다는, 즉 사도로서의 권위를 교회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을 것이다.


5. 예언 성취를 통한 구속사 완성

(1) 오순절 사건을 지금에도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 오순절이 없으면 교회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오순절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 사건과 관련된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 베드로가 밝혔듯 이날의 방언 사건은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 요한의 세례가 물로 이루어졌으나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 사도시대도, 예수님의 성육신도 반복적이지 않듯이 성령이 오순절날 기적처럼 오신 일도 반복되는 일은 아니다.

(2) 개인이 아닌 다수 속에서 나타나는 은사이다.

- 사도행전에는 여러가지의 개인 회심 사건이 있으나 그 곳에서는 방언은 언급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 회심이 극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3) 방언은 성령 세례와 관계 없다.

- 2차 성령 세례도 당연히 없다.

- 누구나 기독교인이 될 때 다 예외 없이 성령 세례를 받는다.


 방언은 어떤 특별한 패턴을 가지고 받는 것이 아니고 노력하거나 간구한다고 받는 것도 아니다. 초기 교회가 생겨나는 특별한 시기에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방언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그 말씀에서 믿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못했던 유대인이라는 시각이 또한 놀랍게 받아들여진다.




▶ 고린도전서의 방언

1. 고린도전서의 배경

(1) 고린도라는 도시

- 고린도는 머리 긴 남창들이 많던 곳이었다. 그래서 고전 11:14에서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며 충고한 것이다.

- 사랑과 다산의 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는 이 곳은 천 명의 여사제들이 일하며 밤에는 예배의 한 의식으로 몸을 팔던 곳이다.

- 13장의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어쩌면 아프로디테 신전의 광란의 의식에서 사용된 요란한 악기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델파이 신전'이 있는데 이곳의 신탁(오라클)은 명성이 대단했다. 그곳에서는 '방언 예언'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 이런 신전에서 사용된 방언과 예언은 제물로 바쳐지는 돈의 액수에 따라 달라질만큼 의미없고 정신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 이런 면에서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이러한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에베베에베베' 방언이 잘못된 혹은 적어도 교회와는 맞지 않는 것임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2) 고린도전후서의 어투

- 고린도 교회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분노, 빈정거림, 책망, 교정 그리고 교훈으로 점철되어 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교훈을 주기위한 편지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매우 긴박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다. 방언 주장자들이 하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해 주신다는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은 도리어 지금 방언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이 하고 있는 것이다.

-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많은 관심이 있고 또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 듯 하나 그 중 방언을 우선시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바울은 3장에 걸쳐 은사에 대한 범주 안의 방언에 대한 말씀을 남기고 있다.


2. 12장 : 은사의 본질

- 방언을 사용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말하는 경우도 생기는 등 여러 사탄의 공격이 있었던 듯 하다.

- 은사의 주인은 하나님 한분이시다. 교회를 갈라놓는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은사라고 할 수 없다.

- 의도적으로 은사를 나열할 때 방언을 가장 마지막에 두고 있다.

-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으로 노력이나 간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등급을 나눌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 누구나 다 특정 은사를 (누리고 싶다고) 누리는 것이 아니다.

- 31절. But earnest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I show you a still more excellent way.(NASB)

-> 지금껏 12장 전체에서 은사를 무작정 받으려 하고 행하려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 하고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 말하기엔 어색해보인다. 한글 번역에 빠진 But 을 생각해본다면, earnestly의 간절하게 라는 의도적인 강조점을 생각해본다면 "그러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간절히 사모해(봐)라. (난 그것과 관계없이)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여전히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겠다." 라고 비꼬는 듯한 말투로 읽는 것이 옳을 듯 하다.

- 본격적으로 방언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방언을 포함한 더 큰 테두리인 은사의 본질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 이어서 방언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사랑에 비하면, 혹은 사랑이 없으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가르쳐 준다.

 

3. 13장 : 은사보다 귀한 것과 온전한 것의 도래

- 1절에서 굳이 방언을 짚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 방언으로 인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의미하다.

- 온전한 것이 올 때 : 성경이 완성될 때 예언, 방언, 지식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초대 교회 시절 완성된 성경이 없었던 시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성경이 완성되면서 목적이 완수되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다. 이 역할은 오롯이 성경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 13절을 영어성경은 But 혹은 And로 단순히 연결한다. '그런즉'으로 번역한 한글 성경과는 뜻이 좀 다를 수 있다. 믿음, 소망이 천국에 갔을 때 필요없어지기 때문도 아니다. 13절 자체에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다고 했다. 도움이 될 만한 한 해석을 언급하자면 여기서 사랑은 요한일서 4:16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더이상 강조할 수 없을만큼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13장 내내 사랑에 대해 강조한 본문은 은사가 이기적 속성이 아닌, 사랑을 반드시 품어야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 은사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남을 세우고 돕는 것이다.


4. 14장 : 방언의 본질과 역할

(1)방언과 예언의 비교

- 예언에 대해서 정확한 설명은 없으나 표와 같은 내용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방언

예언 

이해 안 되는 말

이해되는 말 

자신에게만 도움이 되는 은사 

교회에 도움이 되는 은사 

혼자 얼마든지 활용하는 은사 

교회를 위해 공동체 안에서 활용되는 은사 


(2) 2절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 비록 문제가 좀 있지만 여전히 유용한 방언의 효용성을 이야기 하는 걸까? 문맥에 맞지 않게?

- 14절에도 나의 영으로 기도한다는 부분이 있는데 비꼬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마음엔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 나의 영이란 표현은 12장의 하나님의 영이란 표현과 대비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 성경은 마음과 영혼을 특별히 다르게 보지 않는다. 결국 바울의 비아냥 거리는 표현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3) 하나님의 암호

- 전쟁시에 상대방이 우리 암호를 해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영적 전쟁에서 사탄이 알아듣지 못할 하늘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 에베베 에베베 방언은 말하는 사람조차도 알아듣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전쟁시에 우리편도 알아듣지 못하는 암호를 뿌리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4) 은사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 개인 경건의 증진이 교회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지금의) 방언이 유익하다 라고 주장하는데 신유의 은사로 나은 사람이 교회를 해집고 다니며 피해를 주기 시작하면 그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해치는 은사인가?

- 바울이 말하는 것은 각각의 은사의 역할에 근거한 직접적 영향력에 대한 것이다.

(5) 방언을 통역하라는 가르침의 중요한 의미

-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 즉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주변의 누군가(현지인 등)에 의해 알아들어졌다.

- 언어와 소리는 다르다. 특별히 음이없는 피리나 거문고 등으로 통역되지 않는 방언이 음이 없는 악기가 내는 소리와 다름 없음을 말씀한다.

(6) 품위 있고 질서 있게

- 개인 경건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 앞에서 방언을 사용하라. 다만 많아야 세사람이, 그마저도 통역이 되지 않으면 사용하지 말것을 명한다. 그리고 이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해야 한다.

- 그러므로 오히려 예언을 하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기에 모두가 분별할 수 있으므로 도움이 된다.

- 다만 이 시대는 온전한 것이 아직 오지 않은 시대이기에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고 명한다.

- 이는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주의 명령이라고 말씀한다.(37, 38절)


 오늘날의 방언

1.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닌 이유

(1) 오늘날의 방언은 학습과 훈련으로 습득 가능하다.

- 은사는 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주권이기에 당연히 그것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이유도 없다.

- 은사, 특별히 방언으로 성령님의 내주 혹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2) 오늘날의 방언은 기독교 밖에 더 많이 있다.

- 특별히 이단이나 사이비의 제사장소에 가보면 쉽게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들은 그런 체험으로 자신이 믿는 것을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다.

- 같은 행동이 교회 안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고, 교회 밖의 다른 장소이기 때문에 이상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2. 오늘날의 방언 열풍이 줄 수 있는 위험들

- 에큐메니컬 운동의 동력 : 전기독교적인, 통합하고 연합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사상.

- 구원의 이원화 : 성령의 사역을 구원사역과 (2차 성령세례를 통한) 충만 사역으로 이원화 시키는 잘못을 범한다.

-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 : 성령이 무슨 비타민인줄 아나.

- 한두 구절로 만들어진 신학 : 무엇보다도 말씀의 왜곡된 해석이 보태진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말씀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더 올바른 번역을 하기 위해 여러가지 버전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런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해소하고 싶어하고 현대에 들어서 '방언'이란 것을 찾아낸 듯 하다. 2천년 가까운 시간동안 사용되지 않았기에 잘 모르는,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어서 거룩해보이는 방언을.

 에베소 지역에 이름이 없는 신에게 라는 신에게 경배를 하는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하나님을 알기위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모세의 부재로 바른 이끄심을 따를 수 없을 때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하나님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심이 이 시대에는 방언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는다고 무조건 옳은 일이 아님을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 사건으로 우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고, 그 성경을 잘 알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주신다. 즉, 성경을 어긋나는 성령이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아갈 땐 성경을 통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 부족함을 체험으로 채우려 해서는 안된다.

 교단의 특성 때문인지 주변에서 방언이 많이 들리진 않는다. 간혹 기도회 할때 들리곤 하지만 그 분들은 구석진 곳에서 기도하시곤 한다. 그 분들의 열심을 알고 존경한다. 이런 말을 하는 나보다도 더,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 뜨거움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방언을 받게된 연유와 성경에서 방언을 어떻게 말씀하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분들의 신앙이 우리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해지고 나누어져서 그것을 듣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늘 문을 여는 열쇠
하늘의 언어. 김우현. 규장

 3년 넘게 전에 선물받은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바로 읽어보고자 했으나 책 내용의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쉽게 열면 안될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앞부분 조금 읽다가 책꽂이 한켠에 꽂아둔 책인데 이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어보았다.

 물론 난 이 책의 내용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읽기 시작하였고 여전히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의 생각으로 책 내용을 왜곡하고싶지는 않아서 서너시간 걸려 다 읽고나서 바로 기록을 남겨두려고 한다.

 최근에 읽었던 몇몇 신앙서적과는 달리 굉장히 읽기 쉬운 에세이 형식으로 되어있다. 저자의 경험을 그대로 기록해두고 생각을 적어두었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참 못 읽는 내가 저정도의 시간만에 다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경험이 많기에 그 부분을 하나하나 남겨두기보다는 그 안에 저자의 생각이 적힌 부분, 성경을 인용한 부분, 책의 말미에 Q & A 형식으로 적힌 부분을 좀 나눌것이다.




하늘의 언어

저자
김우현 지음
출판사
규장 | 2007-07-04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하늘의 언어로 하나님과 소통하라! '팔복' 시리즈로 한국교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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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믿음을 가지고 변함없이 주장하는 내용은

순종(포도주 변화 표적)

방언은 개인의 영을 세우는데 유익하다.

바울은 방언을 많이(양적으로) 한다고 자랑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방언 하기를 권면하였다.

정도가 되겠다.


1.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 고린도전서 14:5

- 바울은 초대교회 교인들 모두가 방언하기를 권했다. 오순절에도 '저희가 다 방언으로 말했다(행2:4)' 라고 했다.

-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누구나 받을 수는 없지만 방언은 모두 다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은사이다.

- 방언은 모든 은사의 기본으로 영이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와 기초가 된다. 바울은 각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은사를 주신다고 했다(고전12:7) 그리고 이 통로를 통해 다른 성령의 능력들이 확장되어 간다.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 고린도전서14:2

- 방언은 '신적인 의사소통'의 단계이기 때문에 사탄이 그 기도를 알 수 없어서 방해받지 않는다. 그렇게 사탄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전략이다.(손기철)

- 방언은 영의 언어이기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알 수 없는 언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언어로 계속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그것을 권하기 때문이다.

- 방언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행2:4)' 하는 기도이다......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나의 영과 성령님이 깊은 탄식으로 그들을 위해 중보해주시는 것이다.(롬8:26)


3.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 누가복음 10:21

- 무엇보다 나를 육신으로 이끌어 곤고하고 탄식하게 했던 내 안의 상처, 찌꺼기들이 방언으로 정화되자 성령님의 주시는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방언은 우리로 육신을 좇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그리스도의 성품과 능력에 다가서게 한다.


4.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 고린도전서 14:22

- 방언이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던 바울은 또 이렇게 쓰고 있다. 방언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들을 위한 강력한 표적이다.

- 방언은 결코 알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에 임한 방언도 예루살렘에 온 많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자기가 살던 지역의 언어로 방언하는 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것은 비단 자기들이 쓰는 언어를 사용했다고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 즉 아귀까지 채우니 .....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 요한복음 2:7-9

- 주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지요. 채운 물 자체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지만 순종해서 아귀까지 가득 채우자 포도주로 변한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조연화 전도사(순복음 계열))


6.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 이사야 28:11,12

- 이와 같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안식, 상쾌함, 안식을 얻을 수 있다.


7.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요엘 2:28

- 나는 그것을 보며 성령님께서 주시는 확증이라 믿었다........요엘서의 만민에게 부어주신다는 하나님의 영이 방언이 아닐까 생각하며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 성구가 눈에 들어왔을 때, 성령님의 확증이라 믿게 된 것이다.


8.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 고린도전서 14:12

-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에베소서 4:12


9. 이들도 그렇게 주님을 위해 헌신해왔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좋은 프로그램과 열정만으로는 진정으로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보좌 가운데서 나오는 능력, 성령이 임하여 부어주시는 그 '권능(행1:8)'이 부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 스가랴 4:10

- 이 말씀을 근거로 주변의 누구라도 소중히 여기고 방언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심(내 설명임)



Q & A 내용 중

- 우리시대 성령으로 충만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렇지 않은 일면을 가지고 그 본질을 흐리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은사를 사무하는 자는 특별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깊은 기도와 찬양 가운데 우리 영은 그것을 너무나 표현하고 싶어 했지만 지식의 부재로 하지 못한 것이다.....이 깨달음은 방언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극적인 체험을 통한 방언이 유익할 수도 있지만, 단지 성령님께 맡기고 몇 단어를 반복하는 방언을 받은 사람이라고 더 깊은 영적 체험에 들어가지 못하는 법은 없다.

- 그래서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적 지성인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성령님이 2천년 간이나 교회사에서 무시당해왔다"고 외친 것이다.

- 방언만이 아니라 교회를 능력있고 유익하게 한 치유, 축사, 예언 등도 4세기가 되기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광신적인 것'이라든지, '체제를 위협하는 무질서'라는 부정적인 관념을 유포한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엔 나름대로 그것을 닫으신 하나님의 '섭리적 허용'도 있을지 모른다. 교회가 진리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을 잃어버리면 더욱 큰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문을 여셨다. 문제는 진정으로 내가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그 친밀함의 교제 가운데 나아가기를 소망하느냐일 것이다. 그것이 내 안에 있다면 우리는 방언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영적인 문'을 여는 기초이며 아버지의 나라를 살아가는 데 너무나 유익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책 마지막 두단락)





 일부러 책내용을 그대로 기록해두려 했다. 난 앞에서 말했듯이 이 책의 내용에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내 생각을 적는 과정에서 책의 내용을 왜곡할까 싶어서이다. 그리고 발췌 자체가 이미 왜곡의 한 부분임도 인정한다. 그것을 감안하고 읽어보고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말씀을 인용한 부분을 위주로 내용을 가지고 왔다.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 말씀을 사용하다 보면 반드시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를 부탁해'라는 웹툰을 보고 그 작가가 저자에게 많은 걸 배웠다고 하는 걸 보고서도 이 분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고 또 노력하시고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는 데에도 열정이 있는 분이란 것이 느껴졌다.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나마 저자가 방언만을 중요시하지 않고 그것으로 교회를 힘있게 세우려 하는 마음이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책에서 방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주로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인용한다. 하지만 전체의 내용을 한번 독자들과 함께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이 한참 짧고 부족하겠지만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에 대해서는 책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두 단어를 계속 반복하는 기도에 대해서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대비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저자는 성령님의 임재를 방언을 통해 증명받고 싶어하는 듯 하다. 그만큼 성령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좇아 살려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자 하시는 분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성령의 임재가 방언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령님의 임재는 은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사역에서 찾는 것이라 믿는다. 그 구원받은 확증을 방언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은사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련이 있지만 방언은 지극히 개인적인것이고 비밀스러운 것이(라 표현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까 싶다.


이러저러 할 말은 많지만

다음에 읽을 책이 많은 이야기를 또 해줄 것 같아서 여기서 마치고자 한다.